2014년 3월 31일 월요일

지하 동물농장

지하 녹지화도 거의 끝나가고, 좀만 더 하면 이제 지하 1층 전체가 전부 녹지화 될 것입니다. 한쪽 구석에 울타리 치고 지상에서 동물들 유괴해 와서 사육하고 있습니다'ㅅ'

Noteshelf로 지도 만들기

이렇게 지도를 덧대서 필요한 선만 따라 그린 다음에 배경이 되는 지도를 지우면....


이렇게 됨

단, 이 상태로는 축소 확대가 안된다는게 함정....

그래도 파일 자체가 벡터로 만들어 지는 거라 좋은데...

이걸로 지도 제작하느니 차라리 idraw를 구매해서 쓸까 생각 중입니다...

2014년 3월 30일 일요일

인도를 측량하다-인도대삼각측량

무굴 제국을 굴복시키고 인도에서의 경쟁자였던 프랑스까지 몰아낸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조금씩 인도를 장악해 나갔다. 이 와중에 영국은 인도라는 중요한 전략 자원에 대한 조사를 위해 1767년, 인도 측량국(Survey of India)을 설립하고 인도에 대한 각종 지리 조사를 실시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인도 전체 지역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여겨지면서 영국은 인도 전체에 대한 측량 조사를 계획하게 되었다.

인도 대삼각측량(Great Trigonometic Survey)이라는 이름은 문자 그대로 인도의 지형을 삼각 측량으로 쟀다는 뜻이다. 삼각측량은 하나의 기선(Base line)에서 두 측점을 재고 이를 이용해 삼각형을 연속으로 만들어 가며 측량하는 것을 말한다.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삼각형을 만드는 조건 중에 "한 변과 두 끼인각의 각을 안다"를 이용한 것과 같다. 측량에서는 가장 기초를 이루는 측량 방법이라 해서 기초측량으로 불린다.

기선의 시작 부분은 인도 동쪽 벵골만에 연하는 마드라스, 지금의 첸나이 인근에 설정되었다. 이 지역은 당시 무역을 위해 유럽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고, 많이 발달한 곳이기도 했었다. 지나치게 복잡하고 또 70년에 가까운 대대적인 작업 기간에 대해 일일이 다 설명하긴 어렵다. 1802년 대삼각측량이 실시된 이후, 세포이의 난이나 무굴제국의 멸망, 인도 동인도회사의 해체 등이 일어났고, 책임자도 4명이 거쳐 갔다. 19세기 인도의 역사를 이 작업이 차지했다. 투입된 작업자들도 가장 많았을 때가 700명이 넘었을 정도였고, 인도 전역은 물론 히말라야 산맥과 벵골, 더 나아가 버마까지도 측량 범위에 포함되었다.

60년에 걸친 대사업 중 우리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름도 들어 있었다. 조지 에베레스트 경은 윌리엄 랜튼을 이어 2대 사업 책임자였는데 사실상 인도 측량 작업은 에베레스트 대에 거의 다 완성되었다. 그의 이름을 따서 당시 측량 했던 산들 중 가장 높았던 산에 그의 이름을 땄는데 그 산이 바로 지금의 에베레스트 산이다. 인도 대삼각측량은 1870년에 거의 대부분 마무리 되었지만, 이후에도 인도 측량국은 계속 유지되어 1920년대까지 인도 대삼각측량은 계속되었다.

인도 대삼각측량으로 인해 영국은 인도를 효율적으로 식민지배, 수탈 관리 할 수 있게 되었다. 지형에 따라 행정구역도 적절하게 나눌 수 있었고, 영국이 인도에게 마지막으로 준 재앙 선물인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 분리도 대삼각측량이 있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분리가 가능했다. 측량이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대충 이루어져 국경선 등이 대충 형성된 아프리카 국가들이 현재 어떤 분쟁을 겪고 있는지 생각해 본다면, 근대 사회에 있어 정밀한 측량은 좋든 나쁘든 필수적인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인도나 한국 처럼 강제적인 측량을 겪은 곳일지라도 말이다.
1870년 작성된 인도 대삼각측량도 #


출처:

흠.... 작성자 프로필 이름을 어떻게 수정하지...

다른 사람들은 닉네임으로도 작성이 가능한 것 같은데 저는 본명으로 나와서 영 꺼림칙하네요.

작성자 이름을 닉네임으로 바꾸는 방법 같은 건 없나....


혹시 아시는 분 있으신가요?

2014년 3월 29일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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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3월 28일 금요일

비옥한 농토를 꿈꾸는 삽질랜드...




는 미친 것 같습니다;;;;

지상과 지하를 잇는 통로를 만들고 지금 지하로 풀을 유도해서 지하층을 풀밭으로 만들 계획 중입니다...

벌써 풀도 중간 부분까지 내려왔고, 이제 좀만 더 하면 지하층까지 도달할 듯 싶습니다... 


그 다음에는 가축들을 데리고 내려오고....


그야말로 지하 제국의 완성!


2014년 3월 26일 수요일

아이패드가 피시를 대체하기 위한 또 하나의 필수품이 뭘까 생각해 봤습니다

자막 제작기더군요...

지금도 srt나 smi, ssa 같은 자막 만들려면 피시를 이용해야만 하는데 아직까진 그걸 지원하는 모바일 어플이 없죠....

아니면 제가 찾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어쨋든 현실에 맞게 아이패드용으로 라도 나온다면 아마 꽤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겠죠.

2014년 3월 23일 일요일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도와 관련된 첩보전

한국사 자체에는 지도와 관련된 첩보전 이야기가 별로 나오지가 않는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것이라 생각되는 기록이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영류왕 11년(628년) 기록이다. 그보다 앞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지도 기록은 다음과 같다.

11년(서기 628) 가을 9월,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태종(太宗)이 돌궐의 힐리가한(頡利可汗)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고, 동시에 봉역도(封域圖, 지도)를 올렸다.
十一年 秋九月 遣使入唐 賀太宗擒突厥頡利可汗 兼上封域圖
[네이버 지식백과] 영류왕 [榮留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여기서의 봉역도가 무엇인지는 지금도 확인이 불분명하다. 지도는 확실하나 아마도 국토가 대강 그려져 있는 소축척지도일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걸로는 정확한 지형 지물 등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니 실제 전쟁에서 활용하기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 이 때문인지 당나라는 고구려 주요 지역에 대한 지리를 파악할 방법을 찾기로 한다. 이에 근거할 수 있는 기록은 삼국사기 영류왕 24년 기록에 나타난다.



24년(서기 641), 당나라의 임금이 우리나라 태자의 예방에 대한 답례로, 직방낭중(職方郞中) 진대덕(陳大德)을 보내왔다. 대덕이 우리나라 경내에 들어오면서 이르는 성읍마다 그 성읍을 수비하는 관리들에게 비단을 후하게 주면서 말하였다.
“내가 원래 산수 구경을 좋아하므로, 여기에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있으면 보고 싶다.”수비하는 자들이 기꺼이 안내하여, 그의 발걸음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로써 그는 우리나라의 지리에 대하여 상세하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중국인으로서 수나라의 말기에 군대를 따라 왔다가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을 만나 친척들의 안부를 전하여 주었을 때, 모두 눈물을 흘렸다. 이 때문에 도로 양편에서는 남녀들이 이를 구경삼아 보았다. 임금이 호위병을 장대하게 세우고 당나라의 사신을 접견하였다. 대덕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의 국력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하였다. 대덕이 본국으로 돌아가서 보고하니, 황제가 기뻐하였다.(후략)
二十四年 帝以我太子入朝 遣職方郞中陳大德答勞 大德入境 所至城邑 以綾綺厚餉官守者曰 吾雅好山水 此有勝處 吾欲觀之 守者喜導之 遊歷無所不至 由是 悉得其纖曲 見華人隋末從軍沒留者 爲道親戚存亡 人人垂涕 故所至士女夾道觀之 王盛陳兵衛 引見使者 大德因奉使覘國虛實 吾人不知 大德還奏 帝悅 (후략)

[네이버 지식백과] 영류왕 [榮留王] (원문과 함께 읽는 삼국사기, 2012.8.20, 한국인문고전연구소)



직방낭중 진대덕이 첩자 노릇을 하러 사자로 온 것으로 생각하기 쉬우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진대덕의 직위인 직방낭중에 있다. 주례에 보면 직방낭중은 직방을 관리하는 관리로 직방은 6경 중 하나로 군사를 담당하는 하관에 속하며, 국내의 지도를 모아두는 관청이었다. 요즘 말로 말해서 한국 국방부 지형정보단장이 외국에 외교관으로 파견되어 가는 곳마다 관광하겠다면서 국경 주요 지역들의 지형지물을 눈으로 다 봤다는 뜻이었다.


결과적으로 진대덕이 눈으로 고구려 땅을 본 뒤 무엇을 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적어도 그냥 눈으로만 보는데 그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 진대덕이 무엇을 했든 그것이 1차 고당 전쟁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에르빈 롬멜 사진-2




1943년 12월/1944년 1월, 프랑스 북부 대서양 방벽 진지를 시찰 중인 롬멜 원수





1943년 12월 19일, 서부전역 사령부로 쓰이는 파리 "조르쥬 5세" 호텔에서 회의 중인 롬멜, 룬트슈테트, 가우제 중장, 치머만 중령(좌에서 우순서)




1943년 12월 19일 파리에서 회의 중인 롬멜 원수와 룬트슈테트





1943년 12월 19일, 서부전선 사령부에서 대화 중인 롬멜과 룬트슈테트




1943년 12월 21일, 벨기에 Raversijde의 대서양 방벽 공사 현장을 시찰 중인 롬멜과 참모들. 현장에서 부사관의 설명을 듣고 있다.





1943년 12월 21일, 벨기에 Raversiide의 Saltzwedel-Neu 포대를 시찰 중인 롬멜과 참모들





1943년 12월 22일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방어 진지를 시찰 중인 롬멜. 롬멜 오른쪽의 인물은 16공군 야전 사단장 Rupprecht 중장





1944년 초, 프랑스 방어 진지를 시찰 중인 롬멜과 참모들




1944년 초 대서양방벽을 시찰 중인 롬멜




1944년 1월 16일, 프랑스 북부 Barneville 인근의 대서양방벽 지역을 시찰 중인 롬멜과 참모들 . 오른쪽부터 von Tempelhoff 중령, Rueissner 중령, Zeltmann 소장, 롬멜 원수. 롬멜 원수 왼쪽의 인원들은 투르게스탄 대대 장교들이다.




1944년 2월 프랑스 서북부 비스케이 지역의 "자유인도군" 소속 병사들을 시찰 중인 롬멜 원수



1944년 2월 9일, 남프랑스 스페인 국경 Hendaye 인근을 시찰 중인 롬멜 원수(왼쪽에서 예검, 혹은 지휘봉으로 보이는 물건을 든 인물)





1944년 2월 10일, 프랑스 서부 해안  Lacanau Océan, 대서양 방벽 진지를 담당하고 있는 자유인도군 병사들을 시찰 중인 롬멜.



1944년 2월 19일, 프랑스 로리앙, 해안가에 설치될 장애물들을 살펴보고 있는 롬멜





1944년 3월, 롬멜 원수와 대화 중인 Erwin Menny 중장.




1944년 3월 11일, 프랑스 북부, 롬멜 원수와 독일 장교들




1944년 봄, 대서양 방벽을 시찰 중인 롬멜 원수




1944년 3월 30일, 프랑스 북부 Canteleu, 81군단 사령부, 전략 회의 중인 롬멜과 룬트슈테트 원수.




1944년 4월, 프랑스 북부/벨기에 해안 지역의 방어 시설물들을 시찰 중인 롬멜과 독일 장교들




1944년 4월, 프랑스 파리, 전략 회의 중인 롬멜을 비롯한 독일 주요 장성들, 왼쪽 두번째부터 G집단군 사령관 Johannes Blaskowitz 상급대장, 제3항공군(Luftlotte 3) 사령관  Hugo Sperrle 원수, 서부전선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 B집단군 사령관 롬멜 원수.




1944년 4월 18일, 프랑스 파드 칼레, 대서양 방벽을 시찰 중인 롬멜과 참모들



1944년 5월/6월, 프랑스 Rouent, 21기갑사단을 시찰 중인 롬멜 원수





1944년 5월 말, 북프랑스 채널 해안 인근에서 8cm 로켓포 발사 사격을 참관하고 있는 롬멜 원수.




1944년 5월/6월, 대서양 방벽을 시찰 중인 롬멜 원수



1944년 5월/6월, 프랑스 해안의 대서양 방벽을 시찰 중인 롬멜





1944년 5월 18일, 혹은 그 무렵으로 추정되는 사진. 프랑스 북부 Rouent의 21기갑사단을 방문한 롬멜 원수.



1944년 5월 30일, 프랑스 북부 영국 채널 해안가의 Riva-Bella, 8cm 로켓포 사용을 참관 중인 롬멜 원수




1944년 5월 30일 프랑스 북부 Riva-Bella에서 장교들과 대화 중인 롬멜 원수.


이게 다인 듯 싶군요. 이후에는 롬멜의 사진을 찍은게 없고, 다음에 나오는 사진이 롬멜의 장례식 사진 뿐입니다. 아마 그 이후 상륙 작전 때문에 사진을 찍을 타이밍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2014년 3월 22일 토요일

에르빈 롬멜 사진-1



1939년 비행기를 타고 이동 중인 롬멜 소장과 총통사령부 요인들


1940년 봄, Mosel 강 인근, 7기갑사단장 롬멜 소장(오른쪽)과 참모장 Julius von Bernuth 중령(왼쪽)



1940년 5월/6월 프랑스, 7기갑사단장 롬멜 소장과 참모들이 작전회의를 하고 있다.




1940년 프랑스 전투 중 노르-파드칼레(Nord-Pas-de-Calais) 방면으로 향하는 중, 도로변을 따라 걷고 있는 롬멜. 옆에는 7기갑사단의 35(t) 전차가 이동 중이다.



1940년 6월 프랑스 전투, 7기갑사단장 롬멜과 연대장들



1940년 7월 프랑스 전투 이후 전승 퍼레이드 때 철모를 쓰고 1차 세계대전 때 수여 받은 푸에르 메리 훈장을 맨 롬멜 소장


1941년/1942년 경, 북아프리카 전선에서 롬멜 원수(가운데)와 독일 공군 전투기 조종사 에이스 요하임 뮌헨베르크(왼쪽)


1941년 2월 트리폴리, 독일군 선발대와 함께 들어온 롬멜 장군(오른쪽에서 두번째)과 이를 맞이 하고 있는 이탈리아 장교들과 가리볼디 장군(오른쪽에서 세번째 인물)


1941년 2월, 트리폴리, 북아프리카에 도착한 독일군 선발대의 퍼레이드를 보고 있는 독일과 이탈리아 장교들.



1941년 2월, 북아프리카 군단 선발대의 행진을 지켜보고 있는 롬멜과 독일 장교 및 이탈리아 장교들


1941년 11얼 21일, 토브룩 전선의 이탈리아 사령부에 방문한 북아프리카 군단장 롬멜



1941년 11월 21일, 이탈리아군 사령부를 방문한 북아프리카 군단장 롬멜



1941년 11월 29일, 토브룩 전선의 롬멜


1942년 말/1943년 초, 북아프리카 튀니지 전역, 롬멜 원수와 참모 바이얼라인 중령이 탄 차가 추축군 병사들이 탄 장갑차 옆을 지나고 있다. 병사들이 탄 장갑차는 노획한 미제 M3 장갑차이다.
롬멜: 자네들, 왜 카고가 카고인 줄 아나? Car高이기 때문이지. 하하하
병사들: 으아아아!!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 쌍안경으로 전방을 관찰하고 있는 롬멜 중장.



1942년 경, 롬멜과 독일/이탈리아 장교들


1942년 북아프리카, 쌍안경으로 전방을 보고 있는 롬멜



경장갑차를 타고 이동 중인 롬멜




1942년 북아프리카 전선, sdkfz 250/3 "그라이프" 장갑차를 타고 이동 중인 롬멜 원수


1942년 작전 회의 중인 롬멜과 참모들


1942년 경 장갑차를 타고 이동 중인 폭주족 롬멜 원수
롬멜: 빠라빠라빠라밥!


1942년 6월 케셀링 원수와 대화 중인 롬멜 원수



1942년 토브룩 함락 이후 차량을 타고 토브룩 시내를 돌아 보고 있는 롬멜과 바이얼라인



1942년 차량을 타고 순찰 중인 롬멜



장갑차 안에서 통조림 음식을 먹고 있는 롬멜
사실 통조림 안에 든건 영국산 독극물로 2년 뒤 이것이 원인이 되어 롬멜은 중독사 한 것이다


차 옆에서 참모와 회의 중인 롬멜



1942년 1월 참모들과 함께 새 방어진지 위치를 선점하고 있는 롬멜.



1942년 봄, 롬멜과 람케 소장



1942년 1월 롬멜 중장과 Böttcher 소장




1942년 1월 이탈리아 "파비아" 사단을 방문한 롬멜



1942년 2월, 롬멜의 지휘차량 맘모스


1942년 초, 참모들과 작전 회의 중인 롬멜


1942년 4월, 토브룩 공격 전 작전 회의 중인 롬멜과 북아프리카 군단 참모들




1942년 4월 3일, 차량으로 이동 중인 롬멜



1942년 4월 28일, 이탈리아로부터 "Stella Coloniael" 훈장을 수여 받는 롬멜


1942년 5월 25일, 비르하케임 전투 당시 15기갑사단을 방문한 롬멜
롬멜: 우훗 소년, 나의 선글라스 좀 봐줘, 어때 보여?



1942년 6월, 전선에서 이탈리아군을 사열하는 롬멜



1942년 6월 토브룩 전선, 롬멜 중장





1942년 6월 토브룩 전선 롬멜과 폰 비스마르크 소장





1942년 6월 토브룩 항만에서 바이얼라인과 함께 병사들과 대화 중인 롬멜




1942년 6월, 히틀러에게서 육군 원수 계급장을 수여받는 롬멜




1942년 6월 롬멜 원수




1942년 6월 토브룩에서 롬멜 원수




1942년 6월 토브룩에서 롬멜




1942년 여름 롬멜과 21기갑사단장 폰 비스마르크 소장 및 독일 장교들이 회의 중이다.




1942년 6월 18일 엘 알라메인 전선에서 전방을 주시하는 롬멜






1942년 8월 엘 알라메인 전선의 롬멜


처음엔 몰랐다... 선전 중대 놈들이 롬멜 사진을 100장이나 넘게 찍었을 줄을...
작성하는데 시간이 좀 걸려서 게시물을 2개로 나눠 올립니다.